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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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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지부 박금자 지부장

INTERVIEW 01

학비노조 탄생의 막전막후

  • 전남지부
  • 박금자 지부장

전남지부 박금자 지부장은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이하 ‘학비노조’) 역사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학비노조 출범을 가장 앞에서 끌고 간 인물인 것. 2011년부터 지난 10년간 학비노조 위원장을 역임하고 지난해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전남지부장을 맡은 박금자 지부장을 만나 학비노조가 출범하기까지의 험난했던 여정을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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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제대로 채우지 못한 노동조합의 첫 단추

박금자 지부장은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다가 동생의 권유로 1995년부터 학교 급식실에서 조리사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학교 급식이 시행된 지 얼마 안 되어 2년만 참고 근무하면 순번제로 기능직 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 “1997년에 드디어 제가 기능직 공무원이 되는 순번이었는데, IMF 사태가 터졌습니다. 그러면서 당분간 공무원 전환 제도가 없어져 버린 거예요. 그래도 언젠가는 기능직 공무원으로 전환될 거라는 기대로 심한 노동 강도의 급식실 일을 버티고 견뎌왔는데 5년, 6년이 지나도 여전히 급여명세서에는 저를 ‘일용잡급’으로 표현하고 있었어요. 당시에는 비정규직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거든요. 그때 알았죠. 더는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란 걸요. 정말 억울했고,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 나이 40살이 되던 2004년 전남지부 노동조합을 세웠습니다.”

그가 노동조합을 세우겠다 마음먹었던 것은 남편의 영향이 컸다. 당시 교사로 근무하면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일을 하던 남편을 보면서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설립해 교육청 소속 근로자로서 기능직 공무원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2003년부터 작심하고 전라남도 내 각 학교 급식실로 전화해서 400여 명의 조합원을 모집했어요. 그리고 2004년 봄방학과 여름방학 때 교육청 앞에 200~300여 명의 조합원이 집회를 열었습니다. 생전 해보지도 않은 집회를 한다고 모였는데, 저희보다 더 많은 수의 전경들의 모습에 얼마나 겁이 났었는지 몰라요. 혹시라도 내 가족, 내 동료에게 해를 끼치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서 조합원들은 얼굴을 꽁꽁 싸매고 눈만 내놓고 집회했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우리의 힘은 너무 약했어요. 교육청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고, 조합원들의 열정이 시들해지면서 결국 노동조합을 접어야 했습니다.” 노동조합의 첫 단추를 제대로 채우지도 못한 채 막을 내려야 했던 당시 박금자 지부장은 한동안 허탈감에 빠진 채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아무 성과 없이 끝난 것에 대해 아쉬움이 항상 남아있었고, 당시의 패배감이 시간이 흐를수록 우울한 감정으로 변화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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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앞장서서 교육감 선거운동에 올인하다

2007년 일용잡급에서 연봉제로 전환되었지만, 처우는 달라지지 않았다.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근무 일수도 줄어들었고 근속연수도 인정받지 못했다. 16년째 일하는 조리사나 신입 조리사나 급여는 똑같이 80여만 원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2010년 새로운 살길이 열렸다. “2010년 1월 교육감을 직접선거로 뽑는다는 뉴스를 보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어요. 우리 손으로 직접 교육감을 뽑는다면 분명 학교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살길이 열릴 거란 확신이 들었죠. 그래서 우리의 처지와 목소리를 들어줄 만한 교육감을 당선시키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박금자 지부장은 교육감 선거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전남지역 조리사들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식실 일은 그대로 하면서 퇴근 후에는 선거운동에 올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족들에게 정말 미안한 일이었죠. 당시 작은아이가 고3 수험생이었고 남편은 고3 담임이었거든요. 그래서 두 사람을 불러놓고 여태 나는 가족을 위해 살았으니 1년만 이 일을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다행히 두 사람 모두 저를 이해해줬어요.”

박금자 지부장과 전남지역 조리사들은 7명의 교육감 후보자 중 순천대학교 총장이었던 장만채 후보를 돕기로 하고 200여 명의 조직을 꾸려 선거운동사무실에 합류했다. 그리고 1월부터 본격적으로 교육감 지지자카드도 만들고, 주말에는 선거유세에 함께 뛰어다니는 등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많은 일을 했다. “선거운동 초반에는 교육감 후보 지지도 여론조사에서 항상 3위를 했었어요. 그래서 조리사분들에게 ‘후보자를 잘 선택한 것이 맞냐’는 압박도 많이 받았어요. 그렇다고 중간에 다른 후보자로 갈아탈 수는 없잖아요. 꼭 승리하고 싶은 마음에 계속 열정을 불태운 결과 선거 3주 전에 여론조사에서 1위로 올라섰어요. 결국, 실제 투표에서는 54%로 승리했습니다.”

장만채 교육감이 당선된 후 학교비정규직 실태조사는 물론 교육청 실무자들과의 처우개선 방안을 의논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오랜 기간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개선 방안을 많이 고민해왔기 때문에 저희의 의견을 정확히 요구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한 번에 모두 개선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 일단 세 가지 약속만 먼저 받아냈습니다. 첫 번째는 근무 일수를 당시 245일에서 265일로 늘리는 것, 두 번째는 명절상여금을 만들어 달라는 것, 세 번째는 근속 수당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선사항을 기자회견을 통해 공표해달라고 요구했죠. 그래서 2010년 9월 6일 기자회견을 통해 공표되었고, 이것이 전남지역 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을 빠르게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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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의 노동조합 실패 때문인지 조리사분들에게 다시 한번 노동조합을 만들어보자고 했을 때
회의적이었어요. 그래서 또다시 한 사람, 한 사람 설득하면서 조직화에 박차를 가했어요.
당시 몸무게가 8kg이나 빠졌을 정도로 많이 돌아다녔던 것 같아요.

03전남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확장한 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박금자 지부장은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장만채 교육감을 당선시킨 뒤 이를 계기로 다시 한번 제대로 된 노동조합을 꾸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가 원하는 교육감이 당선되었지만, 이 한 사람만으로 우리의 처우가 지속해서 개선될 거란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2004년의 노동조합 실패 때문인지 조리사분들에게 다시 한번 노동조합을 만들어보자고 했을 때 회의적이었어요. 그래서 또다시 한 사람, 한 사람 설득하면서 조직화에 박차를 가했어요. 당시 몸무게가 8kg이나 빠졌을 정도로 많이 돌아다녔던 것 같아요.

그 결과 드디어 2010년 9월 18일 1,000여 명의 조합원으로 전남지역 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설립총회를 했고, 같은 해 10월 17일 2,000여 명의 조합원들과 출범식을 거행했습니다. 출범식에는 민주노총 위원장, 전교조 위원장,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 등이 참석했고, 전남지역 교육감이 직접 축사를 하는 등 큰 규모의 행사로 치러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2010년 10월 8일 최초로 학교 비정규직 전임의 길을 열었고, 전남지역 22개 시군의 학교를 새벽부터 휩쓸고 노동조합 가입에 온 열정을 다 바쳤습니다.”

박금자 지부장은 전남지역 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을 만들면서부터 이것을 전국단위의 노동조합으로 확장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지만 지방교육청을 넘어 교육부를 상대로 요구하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1년 2월 19일 고려대학교에서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출범식을 거행하고, 조합원 모집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전국 단일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가장 인접해있는 광주부터 시작해 경기, 인천, 강원, 경남 등 차근차근 전 지역으로 조직 규모를 확장해나갔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지역색이 강하다 보니 힘든 점이 너무 많았어요. 특히 우리 노조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심했습니다. 강원지역에서 ‘학비노조 조합비는 민주노동당 당비로 모두 들어간다’라는 소문이 돌았을 때는 정말 억울했죠. 게다가 노동조합 전국필증이 없어서 어려움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다행히 2011년 12월 30일 드디어 바라던 노동조합 전국필증이 나와서 전국의 교육감들과 교섭할 수 있게 되었고 조직 확대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제 얘기에 공감해주시고 가입원서를 써주시 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는 분들이 많아 버틸 수 있었습니다. 특히 당시 광주 학교급식조리사회 회장이었던 한연임 지부장님을 비롯해 지역색이 가장 강했던 강원지부 설립에 많은 도움을 주신 우형음 지부장님, 개성이 강하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경남지부 황경순 지부장님 등을 일찍 만나게 되어서 이른 시일 안에 전국 단일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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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우리가 직접 변화하는 세상을 이끌어가야 할 때

박금자 지부장은 지난 10년 역사를 돌아봤을 때 가장 큰 성과로 비정규직 고용불안과 처우개선 해결을 위한 최초의 교육감 직접고용과 호봉제 쟁취, 임금인상 등을 꼽았다. “10년 전에는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를 교장이 직접 뽑았는데, 이제는 교육감 직접고용으로 바뀌면서 교장 마음대로 해고할 수 없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근무 환경 역시 많이 좋아졌어요.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의 경우 ‘호봉제’라는 개념 자체가 적용되지 않았지만, 노동조합 설립 초기에는 369라고 3년에 1만 원씩 추가 수당을 받아냈습니다. 이후에 광화문 중앙청사에서 57일 동안 학비노조가 최초로 노숙농성을 했었어요. 당시 종로경찰서와 큰 몸싸움도 있었는데 결국 최남수 교육부장관이 직접 노동조합 투쟁 장소를 방문해 1년에 2만 원 근속 수당을 만들어내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처럼 여러 차례 교섭과 투쟁을 통해 2010년 80여만 원이었던 제 급여가 현재는 250만 원 가까이 올랐어요. 몇 년 사이에 급여나 처우가 확 달라진 거죠. 그러면서 인간으로서 당당함과 자존감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우리 학비노조 조합원들의 단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금자 지부장은 조합원들과의 투쟁과 단결을 모아내어 우리의 임무를 완결했던 순간들이 바로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라고 표현했다. 낯선 지역에 들어가 조합원을 모으고, 교육부와의 교섭과 투쟁 등 순간마다 고통스럽고 힘든 여정이었지만 이 모든 것이 그를 더 강하게 만든 것이다. “지난 10년은 비정규직이라는 굴레와 80만 원이라는 저임금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을 했다면 앞으로의 10년은 다른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의 법과 제도가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바뀌지는 않지만, 세상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정말 빨리 변화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변화를 정부가 주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변화를 예측하고 선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결국, 우리는 계속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투쟁하면서 정치를 시대에 맞게 바꿔야 합니다. 노동자가 직접 정치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앞으로 우리의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조합원들의 의식변화를 위한 교육에 더욱 힘을 실을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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